2013년 8월 11일 일요일

한국의 수능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보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008년 11월 12일(현지시간)자 1면과 15면에 한국의 수능시험독특한 풍경을 상세히 다루었다. 

이 신문은 당시 “날씨가 쌀쌀했던 최근 주말 저녁 김남선 씨는 1000명의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서울 남쪽의 한 사찰에 모여 밤새 기도를 했다. 

그녀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3000배의 절을 하며 아들에게 행운을 기원했다.”라고 적었다.


미국인(WSJ)에게는 밤새 3000배을 하는 한국 부모들의 대단한 정성이 아마도 독특한 풍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모습은 참 익숙하고,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 경우 수능 며칠 전부터 교회와 절은 수능을 치루는 아들과 딸을 둔 부모들로 북적거린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국의 수능일은 마치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 행사일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북한의 김일성 주석죽은 후 북한 주민들이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TV를 통해서 보고, 잠시 정신적인 혼란 빠졌을 때생각났다.  


 슬퍼하는 북한주민

위의 두 모습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한민족의 밑바탕에 흐르는 독특한 정서를 조금 읽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유명한 점술가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국민 모두에게 부처님을 선물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때문에 십원 동전에 불상을 넣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한국인 종교성은 유별나게 깊은 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어려운 시험인 국가고시를 새롭게 생각해보자.

이런 시험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렵고 또한 시험 준비기간 너무 길기 때문에 응시자들을 종교적으로 만들 수 있다.



마치 환경적으로 감내하기 가장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종교에 가장 강하게 종교의존하듯이, 한국의 어려운 국가고시가 수험생에게 종교성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만약 시험점수 1~2점 차이로 사람의 운명이 바뀐다면, 누구든지 종교에 의지하려 할 것이다. 

어째든 한국 사회너무 경쟁적이어서 종교의존하기 좋은 사회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이런 시험들은 주어진 정답, 즉 암기를 요구한다는 어두운(?) 특징을 가진다. 

이 때문에, 이런 시험들은 시험 응시자들에게 시험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과정은 무시하도록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결국 이런 시험들은 문제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 등의 창의적인 생각을 없애고 단지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암기하는 요령만을 요구한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암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출세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런 시험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진 이론과 학문을 단순히 문장으로 암기하여 서로 연결하고 종합하는 정도를 응시자에게 요구하지,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창조적으로  재조립하고 능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런 사회는 현상 속에 숨은 의미와 근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사회는 암묵적으로 권위를 중시하고 창조적인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인 특성 때문인지 아직까지 한국에서 과학자 분야의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없다.
또한 종교는 이런 시험을 준비하는 응시자에게 마치 위약효과(플레시보 효과, placebo effect)와 비슷한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종교는 이겨내기 힘든 시기에 이들에게 합격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마치 연인이 서로를 사랑할 때 분비되어 서로 사랑에 눈멀게 만드는 사랑의 호르몬들(도파민, 세라토닌 등)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효과를 통제감에서 찾고 있다.  
즉 심리학자들은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강력하고, 자신이 어떤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은 자신을 매우 기쁘게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통제할 수 없는 것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정신 건강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로 심리적 통제감(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할지라도)을 서슴없이 꼽는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심리학자들은 ‘특히 더 놀라운 사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주는 심리적인 이득이 진정한 통제력이 주는 이득과 별 차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에서의 종교는 주로 자신의 욕심(합격 등)을 채우는데 사용된다는 단점을 가진다. 

즉 이런 태도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다분히 기복적 신앙이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어려움들을 좀 더 잘 제어할 수 있도록 발전해왔다. 

이에 따라서, 인간의 판단기준이 '인간 신체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종교성에서 부터 자연의 합리성으로 조금씩 바뀌어 왔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점수 위주의 서열구조(권위주의 등)를 허물고 창조적인 사람을 흡수할 수 있는 교육 및 시험제도로 점차 바뀌었으면 한다.


회식과 음주 문화는 남성 우울증 때문이다?

우연히, 고려대학교 우울증센터 소장인 이민수님이 쓴 '마음의 감기 치료법 우울증 119'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 중에 남성 우울증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그대로 올려놓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남자들은 경쟁자들이 우울증적 상태에 있는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회식과 음주문화'라고 주장했다.

아래는 이 책의157 페이지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남성은 생존이라는 진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위해 자신이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사회의 경쟁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극단의 상황에 이르러도 숨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이 심한 경우에도 최후의 순간까지 사회적인 업무완수하려 한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찾아오는 우울증은 결국 업무 능력을 마비시키게 될 것이다.

이 경우를 대비해 진화적인 힘은 자연선택을 통해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 속해 있는 남성들로 하여금 경쟁자들이 우울증적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교묘한 안전장치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 안정장치란 바로 '회식과 음주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우울증으로 인한 자신의 감정적 고통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경쟁자 능력 최소화시키고 모종의 설득과 회유와 결탁을 통해 자신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를 미리 차단시킨다. 

이로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혹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회식'이라는 사회적 전통을 만들어 내었고, 여기에 ''이라는 무기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정, 화합, 단결 등의 말들이 슬로건처럼 내걸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런한 술을 통한 화합의 장으로써의 회식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긍정적인 효과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남성들의 우울증에 대한 이러한 대처 전략들은 일정한 수준까지는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수단마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때, 남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보다 극단적인 방법 밖에 업게 된다.

그것이 이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자살'이라는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설경구 


자신들이 별 생각 없이 마구 내던졌던 공수표로 인해 최후의 순간 '파산선고'를 해버리는 것이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허세를 부리며 어쩔 수 없는 순간에 가서 파산선고를 해버린다.

우울증은 우리의 현재 삶의 방향을 재평가하거나 삶의 속도를 조절하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열이나 기침 등이 감기라는 증상을 만들지만, 이것이 우리 몸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과 매우 흡사하다.


열과 기침감염예방하고, 호흡기에서 이물질제거하려고 설계된 진화론적 기제이다.

따라서 열과 기침이라는 증상을 없애려고 한다면 인간이라는 전체 시스템을 손상시킬 가능성도 있다.

'심리적 감기'로 불리는 우울증도 이러한 긍정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인생 속에 숨어있는 더 많은 의미를 찾고 더 풍부한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으로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남이 당신을 성공시키도록 하라!

“Justice –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대학 강의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센델(Michael J. Sandel) 교수가2012년 6월 1일 연세대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제목의 강의를 했다.  

이날 강의는 추첨에 의해서 무료입장권을 제공하였으나, 높은 관심 때문에 무료입장권이 암표로 판매될 정도였으며,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 한국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 거의 폭발적일 정도로 크다는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종교가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순간적으로 들어서 한번 간단히 생각해보았다.  

종교가 필요한 이유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면 길어지겠지만, 순간적인 내 대답은 인간이 가진 ‘두려움 또는 고통의 예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많은 방법으로 이를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참고로, 심리학자들은 두려움이 미래를 예견함으로서 얻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뭉크의 '절규')


만약 인간에게 두려움 또는 고통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이 종교나 그 외의 것에 의존할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인간이 두려움 또는 고통의 예견 때문에 존재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자신의 이외의 것에서 충족하기 때문인 것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인간이 외부에서 필요를 충족하면서 산다는 것은 자명하다.

'왜 필요가 존재할까요? "라는 물음에 이에 대한 경제학의 해답은 자원의 희소성에 있지만, 더 근본적인 대답은 인간이 생물이기 때문이다. 

생물은 자신의 필요로 하는 것을 외부에서 얻고 필요 없는 것을 외부로 배출하는 일종의 자생하는 필터(거름막)로서 역할을 한다.

즉 생물의 기본 원리는 개체인 자신과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서 필요를 충족하며 자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의 이유는 확실하다. 

인간은 외부에서 자신의 필요한 것를 충족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수학의 집합으로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즉 A와 B만으로 이루어진 집합에 있어서, 서로 독립적인 독립 부분과 서로에게 포함된 교집합인 공유 부분(A ∩ B)으로 나눌 수 있다. 





위 그림의 해석은, 한 개체(A)는 다른 것(B)과의 공유 부분을 통해서 자신(A)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B는 나 이외의 것, 즉 인간 또는 자연환경 등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공유 부분을 통해서 나와 관계를 맺게 된다.

하지만 이 공유 부분은 자신(A) 뿐만 아니라 다른 것(B)에도 동시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유권 또는 ‘누가 먼저 사용하는가?’에 관한 우선권 등의 권리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욕심은 이 공유 부분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즉 개체(A)는 이 공유 부분을 통해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이 공유 부분 때문에 다른 것(B)에 의해서 제약을 받을 수 있는 trade-off(상반) 관계가 성립한다.  

이를 아주 간략화하여 생각하면, 나(A)에게 발생하는 두려움 내지 고통의 예견은 이 공유 부분을 통해서 유발된다고 유추할 수 있다. 

즉 두려움 또는 고통의 예견은 일종의 물리적인 마찰 현상과 같이 공유 부분으로부터 발생된 심리적 마찰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열이 물체 사이의 마찰에 의해서  발생이듯이, 이 공유 부분으로부터 발생된 두려움 및 고통이 발생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 사회의 집단 성향이 마치 개미 집단처럼 매우 그리고 아주 강하고 강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 공유 부분에 의한 마찰을 이타성으로 극복하여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을 이루었고, 이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이 공유 부분은 결코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인간 문명의 토대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인간 사회에서 이 공유 부분은 인간 개인 사이 또는 개인과 집단 사이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공유 부분의 부작용으로 싸움과 전쟁이 있었지만 큰 흐름은 공유 부분을 통해서 함께 협조하는 것이었다.



집단 성향이 매우 강한 개미의 집


이제는 인간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이 공유 부분에 의한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위 분석을 기초로 한다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1) 개인의 필요를 줄여서 자신에게 속한 공유 부분을 적게 가지는 피동적 방법, 2) 자신의 공유 부분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을 위해서 진심으로 버리는 능동적 방법, 3) 공유 부분을 빼앗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강압적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해결 방법인 피동적 방법은 철학자 또는 종교 등에서 많이 사용했던 방법이다. 

이에 해당하는 종교는 불교가 언뜻 생각이 나고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도 생각이 난다.

두 번째 해결인 능동적인 방법은 종교로는 기독교 등이 생각이 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라는 것은 결국 이 공유 부분에 의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공유 부분에 의한 집착을 버리는 방법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라는 주장한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물론 불교에도 두 번째 해결 방법을 병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해결방법인 강압적 방법은 일반인들이 자주 실행하는 방법인 것 같다.





위의 논의를 통해서 본다면, 종교는 이 공유 부분에 의한 충돌을 줄여서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공유 부분을 더 넓히거나 좁히는 데 관심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샌델 교수님이 말씀하신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자. 

위의 논리에 의하면, 정의는 사회생활, 즉 공유 부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중요한 선택의 문제가 있을 때 개인 또는 집단이 먼저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인간에게 존재하는 아주 강한 집단성 때문에, 개인의 어떤 선택이 집단성을 해치지 않는다면 개인이 먼저이고, 집단성에 해가 된다면 일단 집단이 먼저라는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 집단성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독재자가 자신만을 위해서 욕심을 부리면 이 국가는 망하지만, 이와 반대로 집단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대신 못 가진 자 등을 위한 정책을 펼치면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은 인간의 강한 집당성으로 인한 공유 부분의 충돌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회도 일종의 필터(거름막)를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난을 듣게 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또는 실직 등의 위험이 증가하게 되는 것을 본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에서 집단에 대한 사랑은 아주 강해서 가수 유승준이 집단의 이익인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했을 때 그는 한국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  

그 대답은 아마 자신(A)의 것을 줄여서 공유 부분을 더 늘리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공유 부분을 남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종의 자기 희생인 것이다. 

그 예로 안철수씨의 사회적 명성은 일부분 자신의 공유 부분인 특권을 포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 사회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공유 부분은 내어 놓는 사람에게 환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런 사람에게 과대하게 포상을 하여서 그가 크게 성공하도록 돕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더불어, 종교 및 명상 등과 같이 마음의 수련이 하는 역할은 자기 것(A)에 대한 집착 등을 버림으로서 사람 간의 마찰을 줄이도록 자신에게 속한 공유 부분을 자신의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 또는 집단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통해서 센델 교수님이 말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이 공공성, 즉 공유 부분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 것으로 일단 해석해 보았다.  

이 글의 결론은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라.'는 종교의 가르침에 도달하게 된다. 

진심으로.. 남을 위하면, 그러면 그가 너를 성공시킬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생을 보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었다.

위층으로 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나보다 위층에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버튼이 2개가 있었다. 





하지만, 잠시 나는 어느 버튼을  눌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즉, 나를 태우기 위해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라는 의미로 하강 버튼을 누를까?

아니면, 내가 위층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올라가라는 의미로 상승 버튼을 누를까?
 .....!


순간,  

나의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즉, 내가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앞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내 행동도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