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대머리와 베개는 관련이 있다?

2002년의 신문기사에서 가열요법으로 대머리 치료’라는 글을 보고 대머리에 대해서 관심을 관심을 가졌다.

가열요법에 의한 대머리 치료방법은 영국의 대머리 치료 전문의인 크리슈나 눌리아 박사가 고안한 것으로서, 그는 기후가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빠르고 무성하게 자라며, 일반적으로 겨울보다 여름에 머리카락이 더 빨리 자란다는 사실에서 이 방법을 착안했다.

가열 요법 대머리에 전기침을 통해 전류를 흘리면 두피 주변의 모발세포에 열을 발생시켜서 이 때문에 모세혈관이 확대되고 혈액흐름이 개선됨으로서 대머리의 치료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그 원리는 머리 피부의 온도높아지모세혈관확장돼 대머리의 혈액 흐름개선되고 모낭 산소 영양소 공급 원활해지면서 대머리 치료되는 것이며, 이 치료법의 성공률85%까지 이른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머리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친구 때문입니다. 

대머리인 친구가 자신의 뒷머리 부분머리카락뽑아서 대머리 부분인 앞머리심는 것을 보고 나서 부터이다.

이것을 보고, ‘보통 대머리가 되어도 뒷머리의 머리카락이 가장 나중까지 남아있게 되는데 왜 그렇지?’라는 의문을 잠깐 가졌었다.

또한 그렇다면 "대머리가 되어도 머리의 뒷부분과 옆부분의 머리카락은 남아있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대머리가 진행 중일 때 위 사진과 같이 옆과 뒷부분 머리 주변의 머리카락만 남아 있어야 할 기능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런 의문점을 잠시 가지고 있었지만 바쁜 생활 중에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문득 "밤에 잠을 잘 동안 베개를 베고 자지!"라는 것이 생각이 들었다. 

즉시, 베개대머리연관시키고 있었다.

즉, "그렇다면 잠잘 동안 뒷머리 부분이 베개에 의해서 마찰과 압력을 받게 되고 이 때문에 이 부분의 혈류흐름이 좋아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베개의 이런 순기능적 작용 때문에 대머리가 진행되어도 머리 뒷부분에 머리카락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이런 생각이 타당성이 있다면 대머리 초기에 대머리 부분을 매일 마사지를 해주면 효과가 있을 이다.

실제로 대머리 부분을 마사지를 해주는 것은 초기의 대머리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낭이 거의 죽은 상태인 중기나 말기에는 마사지 효과가 없다고 한다.

[데밍, 품질관리, 일본] 데밍이 패망한 일본을 일으켜세웠다.

1980년대 말에 다수의 사람은 일본 경제가 미국 경제를 추월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당시 일본 기업은 미국 기업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어떻게 40년만에 이런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의 통계학자인 에드워드 데밍(W. Edwards Deming, 1900 ~1993)이 전쟁 후에 일본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데밍은 미국의 벨 연구소에서 통계적 품질관리(SQC)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50년 경에 맥아더 장군에 의해서 일본으로 왔다.




데밍의 이런 품질관리 이론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데밍은 이런 통념과 완전히 다르게 "품질향상은 실질비용을 낮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존 통념에 의하면, 품질향상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알려져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데밍은 생산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다. 소비자를 만족시켜 주는 일이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다.
 
모든 직원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품질 책임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의 수익은 제품과 서비스에 만족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단골고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데밍의 이론은 당시 미국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2차대전 후 미국 제품은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인식되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던 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기업들은 데밍의 이 말에 열광했다.

데밍은 1950년 6월, 일본 과학기술연맹에서 주요 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자신의 품질 관리에 대한 이론을 강연하였으며, 이 강연은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일본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었다.

이때 데밍은 "내말대로만 하면, 일본이 수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으므로 데밍이 시키는 대로 해도 손해볼 것이 없었으므로 데밍의 생각을 미친듯이 실행에 옮겼다.

그 후 70년대 초, 오일 파동으로 전 세계가 불황에 처하자 미국 제품이 도태되고, 품질관리를 중시한 일본 제품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데밍의 품질관리 이론에 따라서, 토요타의 간반(看板)방식이나 지도카(自動化), JIT(Just-In-Time)와 업무 표준화가 생겼났다.

데밍의 이론을 실천한 일본 기업들은 품질을 낮추지 않고서도 저비용으로 다품종 대량생산을 가능케했다.

이에  토요타, 소니와 혼다 등이 만든 일본제 제품은 세계 무대에서 품질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데밍은 품질관리를 발견한 사람(The Man who Discovered Quality)로 불리게 되었으며 일본이 세계 경제를 리드하도록 바꾸어놓았다.

이에 일본은 1950년에 데밍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데밍 상'(Deming Prize)이 제정했다.

당시 데밍상은 일본에서 노벨상 다음의 최고 영예로 꼽혔다. 




토요타가 데밍 상을 받은 건 1965년이고, 일본 차들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그리고,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던 미국은 당시 일본의 성장에 경악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데밍이 미국경제를 2등 경제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후 미국은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세계시장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이후 데밍은 하루 아침에 미국에서 품질관리의 선지자가 되었다.

1980년, NBC 텔레비전은 ‘일본이 했다면 미국도 할 수 있다’라는 제목의 뉴스 특집방송에서 ‘일본 산업의 기적’ 뒤에 숨어 있는 품질혁명을 이끈 데밍을 소개했다. 



이때부터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미국 기업들이 데밍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