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토요일

[데밍, 품질관리, 일본] 데밍이 패망한 일본을 일으켜세웠다.

1980년대 말에 다수의 사람은 일본 경제가 미국 경제를 추월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당시 일본 기업은 미국 기업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어떻게 40년만에 이런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마도 미국의 통계학자인 에드워드 데밍(W. Edwards Deming, 1900 ~1993)이 전쟁 후에 일본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데밍은 미국의 벨 연구소에서 통계적 품질관리(SQC)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950년 경에 맥아더 장군에 의해서 일본으로 왔다.




데밍의 이런 품질관리 이론은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서, 데밍은 이런 통념과 완전히 다르게 "품질향상은 실질비용을 낮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존 통념에 의하면, 품질향상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고 알려져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데밍은 생산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다. 소비자를 만족시켜 주는 일이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다.
 
모든 직원들은 자기가 만든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품질 책임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기업의 수익은 제품과 서비스에 만족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단골고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데밍의 이론은 당시 미국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2차대전 후 미국 제품은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인식되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던 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기업들은 데밍의 이 말에 열광했다.

데밍은 1950년 6월, 일본 과학기술연맹에서 주요 기업의 임원을 대상으로 자신의 품질 관리에 대한 이론을 강연하였으며, 이 강연은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일본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었다.

이때 데밍은 "내말대로만 하면, 일본이 수년 안에 세계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으므로 데밍이 시키는 대로 해도 손해볼 것이 없었으므로 데밍의 생각을 미친듯이 실행에 옮겼다.

그 후 70년대 초, 오일 파동으로 전 세계가 불황에 처하자 미국 제품이 도태되고, 품질관리를 중시한 일본 제품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데밍의 품질관리 이론에 따라서, 토요타의 간반(看板)방식이나 지도카(自動化), JIT(Just-In-Time)와 업무 표준화가 생겼났다.

데밍의 이론을 실천한 일본 기업들은 품질을 낮추지 않고서도 저비용으로 다품종 대량생산을 가능케했다.

이에  토요타, 소니와 혼다 등이 만든 일본제 제품은 세계 무대에서 품질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데밍은 품질관리를 발견한 사람(The Man who Discovered Quality)로 불리게 되었으며 일본이 세계 경제를 리드하도록 바꾸어놓았다.

이에 일본은 1950년에 데밍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데밍 상'(Deming Prize)이 제정했다.

당시 데밍상은 일본에서 노벨상 다음의 최고 영예로 꼽혔다. 




토요타가 데밍 상을 받은 건 1965년이고, 일본 차들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그리고,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던 미국은 당시 일본의 성장에 경악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데밍이 미국경제를 2등 경제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후 미국은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세계시장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이후 데밍은 하루 아침에 미국에서 품질관리의 선지자가 되었다.

1980년, NBC 텔레비전은 ‘일본이 했다면 미국도 할 수 있다’라는 제목의 뉴스 특집방송에서 ‘일본 산업의 기적’ 뒤에 숨어 있는 품질혁명을 이끈 데밍을 소개했다. 



이때부터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미국 기업들이 데밍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